10장. 창발적 시간: 정지된 우주 속 시간의 흐름 (Page–Wootters)
“우주의 바깥에는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 이 충격적인 명제는 양자 중력을 탐구하는 과정에서 등장한 ‘시간의 문제(Problem of Time)’의 핵심입니다. 우주 전체를 하나의 양자 상태 \(|\Psi\rangle\)로 본다면, 이 상태는 외부의 관찰자가 없기에 (3장의 생성자 이론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없습니다. \((H_{total}|\Psi\rangle = 0\), 휠러-드윗 방정식).
그렇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역동적인 ’시간의 흐름’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페이지-우터스(Page-Wootters, PW) 메커니즘은 이에 대한 아름다운 해답을 제시합니다. 시간은 우주의 근본적인 배경이 아니라, 우주의 한 부분을 시계(clock)로 삼아 나머지 부분을 바라볼 때 관계적으로 나타나는 창발적(emergent)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1. 기본 개념 (Fundamental Concepts)
전역 정지 상태 (Global Static State): 우주 전체(시스템 S + 나머지 모든 것 C)를 기술하는 전역 상태 벡터 \(|\Psi\rangle\)가 있다고 가정합니다. 이 상태는 총 해밀토니안 \(H = H_S + H_C\)에 의해 제약을 받습니다: \(H|\Psi\rangle = 0\).
- 이는 ’우주의 총 에너지는 0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며, 외부에서 이 우주를 본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 영원한 정지 상태처럼 보입니다. 🌌
조건화와 내부 시간의 탄생 (Conditioning and the Birth of Internal Time): 시간의 흐름은 ‘측정’과 ’관계’ 속에서 나타납니다. 우리는 우주의 일부인 시계(C)가 특정 시간 ’\(t\)’를 가리키는 것을 보고, 그 조건 하에서 시스템(S)이 어떤 상태인지를 기술합니다.
- 즉, 전역 상태 \(|\Psi\rangle\)에 대해 “만약 시계가 \(|t\rangle_C\) 상태라면, 시스템은 어떤 상태 \(|\psi_S(t)\rangle\)에 있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 2장에서 배운 얽힘과 같이, \(|\Psi\rangle\)는 C와 S가 얽힌 상태(\(|\Psi\rangle = \sum_t |t\rangle_C \otimes |\psi(t)\rangle_S\))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조건화(conditioning)’ 과정이 바로 정적인 전역 상태로부터 동적인 내부 시간을 추출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 상세 설명: 한 장의 사진에서 동영상을 보는 법 🖼️➡️🎬
수많은 무용수가 각기 다른 정지 동작을 하고 있는 거대한 한 장의 사진이 있다고 상상해 봅시다. 이 사진 자체는 변하지 않는 ‘전역 정지 상태’(\(|\Psi\rangle\))입니다.
이제 한 무용수(시계 C)의 팔 각도(\(t\))에 주목해 봅시다. “팔 각도가 30도일 때(\(|t_1\rangle_C\)), 다른 무용수(시스템 S)는 어떤 동작(\(|\psi(t_1)\rangle_S\))을 하고 있는가?”라고 묻습니다. 다음으로 “팔 각도가 60도일 때는 어떤 동작인가?”라고 묻습니다.
시계 무용수의 팔 각도와 시스템 무용수의 동작 사이에 강한 상관관계(correlation)가 있다면, 우리는 시계의 팔 각도를 기준으로 시스템의 동작을 순서대로 배열하여 마치 한 편의 동영상처럼 ’시간의 흐름’을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PW 메커니즘은 2장에서 배운 양자 얽힘이 바로 이러한 상관관계의 역할을 하여, 전역 상태라는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슈뢰딩거 방정식이라는 동영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슈뢰딩거 방정식의 출현 (Emergence of Schrödinger’s Equation): 놀랍게도, 위와 같이 시계의 상태에 따라 조건화된 시스템의 상태 \(|\psi_S(t)\rangle\)는 우리가 잘 아는 슈뢰딩거 방정식 \(i\hbar \frac{\partial}{\partial t}|\psi_S(t)\rangle = H_S |\psi_S(t)\rangle\)을 따라 진화합니다. 즉, 내부 관찰자에게는 완벽하게 표준적인 양자역학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시간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스템과 시계 사이의 얽힘 관계로부터 창발된 것입니다.
실험적 검증 (Experimental Verification): 이는 단순한 사변적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2013년, 얽힌 광자 쌍(Type 1 얽힘)을 이용하여 한 광자를 ‘시계’로, 다른 광자를 ’시스템’으로 삼아 이 메커니즘을 실험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정지된’ 얽힘 상태에서 시계 광자의 상태를 조건으로 걸었을 때, 시스템 광자의 상태가 예측된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라 진화함을 관측함으로써, 관계적 시간의 개념을 실험실에서 증명했습니다.
2. 기호 및 핵심 관계식
전체 상태 공간과 해밀토니안 제약:
- 전체 힐베르트 공간: \(\mathcal{H} = \mathcal{H}_C \otimes \mathcal{H}_S\) (시계 ⊗ 시스템)
- 전역 상태: \(|\Psi\rangle \in \mathcal{H}\)
- 휠러-드윗 방정식 (Wheeler-DeWitt Eq.): \((H_C + H_S)|\Psi\rangle = 0\)
이상적인 시계의 조건:
- 시계의 상태(시간 기저): \(|t\rangle_C\)
- 시계의 해밀토니안 \(H_C\)는 3장에서 배운 ‘시간 이동의 생성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H_C |t\rangle_C \approx i\hbar \frac{\partial}{\partial t} |t\rangle_C\)
조건부 상태와 확률:
- 시각 \(t\)에서의 시스템 상태 (정규화 포함): \[|\psi_S(t)\rangle = \frac{{}_C\langle t | \Psi \rangle}{\sqrt{p(t)}}\]
- 시각 \(t\)를 관측할 확률 (부분 자취와 유사): \[p(t) = \| {}_C\langle t | \Psi \rangle \|^2 = \langle \Psi | (|t\rangle\langle t|_C \otimes \mathbf{1}_S) | \Psi \rangle\]
슈뢰딩거 방정식의 유도:
💡 시간의 교환: 시계의 동역학이 시스템의 동역학으로
유도는 놀랍도록 간단합니다. 전역 제약 방정식의 양변에 시계 상태 \(\langle t|_C\)를 내적합니다.
\({}_C\langle t | (H_C + H_S) | \Psi \rangle = 0\)
\({}_C\langle t | H_C | \Psi \rangle + {}_C\langle t | H_S | \Psi \rangle = 0\)
이상적인 시계 조건 \(H_C|t\rangle_C \approx i\hbar \partial_t|t\rangle_C\)를 첫 번째 항에 적용하면 (정확히는 \(\langle t|H_C = -i\hbar \partial_t \langle t|\)),
\(-i\hbar \frac{\partial}{\partial t} ({}_C\langle t | \Psi \rangle) = -H_S ({}_C\langle t | \Psi \rangle)\)
양변에 \(-1\)을 곱하고 조건부 상태의 정의 \(|\psi_S(t)\rangle \propto {}_C\langle t|\Psi\rangle\)를 대입하면,
\[i\hbar \frac{\partial}{\partial t} |\psi_S(t)\rangle = H_S |\psi_S(t)\rangle\]
시계의 해밀토니안 \(H_C\)가 만들어냈어야 할 시간의 흐름이, 제약 조건에 의해 시스템의 해밀토니안 \(H_S\)가 만드는 시간의 흐름으로 마법처럼 전환되었습니다.
3. 손쉬운 예제 (Examples with Deeper Insight)
- 예제 1: 똑딱, 두 번만 가는 시계 (이산 시간)
- 상황: 시계가 오직 \(|t_1\rangle_C\)과 \(|t_2\rangle_C\) 두 상태만 가질 수 있는 매우 단순한 우주를 상상해 봅시다. 전역 상태가 다음과 같이 얽혀 있습니다. \[|\Psi\rangle = \frac{1}{\sqrt{2}} \left( |t_1\rangle_C \otimes |\text{초기 상태}\rangle_S + |t_2\rangle_C \otimes |\text{나중 상태}\rangle_S \right)\]
- 조건화:
- “시계가 \(t_1\)이라면?” \(\implies |\psi_S(t_1)\rangle = |\text{초기 상태}\rangle_S\)
- “시계가 \(t_2\)이라면?” \(\implies |\psi_S(t_2)\rangle = |\text{나중 상태}\rangle_S\)
- 해석: 정적인 얽힘 상태 \(|\Psi\rangle\)로부터, ’초기 상태’에서 ’나중 상태’로 변하는 한 스텝의 ’시간 진화’가 자연스럽게 추출됩니다. 만약 \(|\text{나중 상태}\rangle_S \approx e^{-iH_S(t_2-t_1)/\hbar} |\text{초기 상태}\rangle_S\) 관계가 성립한다면, 이 이산적인 진화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르는 것입니다.
- 예제 2: 광자 얽힘 실험 (2013년)
- 설정: 편광이 얽힌 두 개의 광자 A, B를 생성합니다. (Type 1 ‘깨끗한’ 얽힘)
- 시계(C): 광자 A. 광자 A가 지나가는 경로의 길이를 정밀하게 조절하여 ‘시간’ \(t\)를 인코딩합니다. (예: 편광판을 \(t\) 각도로 회전)
- 시스템(S): 광자 B. 광자 B의 편광 상태가 바로 \(|\psi_S(t)\rangle\)입니다.
- 측정: 특정 각 \(t\)로 ‘시계’ 광자 A를 측정한 경우에만, 시스템 광자 B를 측정(편광 토모그래피)합니다.
- 결과: 시계의 각도 \(t\)를 바꿔가며 조건부로 측정한 결과, 광자 B의 편광 상태가 \(t\)에 따라 슈뢰딩거 방정식을 따르며 회전하는 것을 관측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적인 얽힘 상태로부터 동적인 시간 진화가 나타남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설정: 편광이 얽힌 두 개의 광자 A, B를 생성합니다. (Type 1 ‘깨끗한’ 얽힘)
4. 연습문제
- (조건부 상태의 정규화): 조건부 상태 \(|\psi_S(t)\rangle=\frac{{}_C\langle t|\Psi\rangle}{\sqrt{p(t)}}\)의 노름(norm)이 1임을, 즉 \(\langle \psi_S(t)|\psi_S(t)\rangle=1\)임을 보이십시오.
- (내부 슈뢰딩거 방정식 유도): 본문 2절의
💡 시간의 교환유도 과정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재현해보십시오. - (시간의 해상도): 시계의 에너지 스펙트럼 폭(\(\Delta E_C\))과 내부 관찰자가 인지하는 시간의 최소 구분 단위(\(\Delta t\))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을지, 시간-에너지 불확정성 원리를 바탕으로 논하십시오.
- (완벽한 시계란?): PW 메커니즘이 잘 작동하기 위한 ’이상적인 시계’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시계의 해밀토니안 \(H_C\)가 시스템 \(H_S\)과 상호작용(\([H_C, H_S] \neq 0\))하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을지 토론해보십시오.
- (열적 시간 가설과의 비교): 11장에서 배울 ‘열적 시간 가설’과 10장의 ’페이지-우터스 메커니즘’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의 차이를 한 문단으로 요약하십시오. (힌트: ’외부’ 시계가 필요한가?)
5. 해설
- \(\langle \psi_S(t)|\psi_S(t)\rangle = \frac{({}_C\langle t | \Psi \rangle)^\dagger ({}_C\langle t | \Psi \rangle)}{p(t)} = \frac{\langle \Psi | t \rangle_C {}_C\langle t | \Psi \rangle}{p(t)}\). 분자는 시스템 공간 \(\mathcal{H}_S\)에 대한 내적으로, \(\langle \Psi | (|t\rangle\langle t|_C \otimes \mathbf{1}_S) | \Psi \rangle\)와 같습니다. 이 값은 확률 \(p(t)\)의 정의와 일치하므로, 결과는 \(p(t)/p(t)=1\) 입니다.
- 본문 2절의
💡 시간의 교환박스 참조. 핵심은 전역 제약 \((H_C+H_S)|\Psi\rangle=0\)과 시계의 속성 \(\langle t|H_C = -i\hbar \partial_t \langle t|\)를 결합하는 것입니다. - \(\Delta E_C \Delta t \gtrsim \hbar\) 관계에 따라, 시간을 정밀하게(\(\Delta t\) 작게) 구분하려면 시계가 매우 넓은 에너지 스펙트럼(\(\Delta E_C\) 크게)을 가져야 합니다. 에너지가 한정된 시계는 시간 측정에 근본적인 한계를 가집니다.
- 이상적인 시계는 (1) 시스템과 상호작용하지 않고(\([H_C, H_S]=0\)), (2) 시간에 따라 단조롭게 변하며, (3) 모든 시간 값을 구분할 수 있는 연속적인 스펙트럼을 가져야 합니다. 만약 상호작용이 있다면, \(H_S\)가 시계의 눈금에 영향을 주어 시간 측정이 왜곡될 수 있습니다.
- 열적 시간 가설(11장)은 특정 열적 평형 상태(KMS 상태)가 내재적으로 가진 고유한 동역학적 흐름(모듈러 흐름)을 물리적 시간으로 정의하는 반면, 페이지-우터스 메커니즘(10장)은 두 부분계(시계와 시스템) 사이의 양자 얽힘과 한 부분계에 대한 조건부 측정을 통해 다른 부분계의 동역학적 시간을 관계적으로 정의합니다. 즉, 전자는 ’상태 자체의 속성’에서, 후자는 ’부분계 간의 관계’에서 시간의 기원을 찾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