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 지연선택과 양자 지우개: 나중의 선택이 현재의 통계를 결정하는 법
양자역학의 핵심 원리 중 하나인 상보성(Complementarity)은, 우리가 어떤 시스템의 입자적 성질(예: 어느 경로를 지났는가?)과 파동적 성질(예: 경로 간 간섭 무늬)을 동시에 완벽하게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지연선택과 양자 지우개 실험은 이 원리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고 실험이자 실제 실험입니다. 이 실험들은 우리가 ’파동이냐 입자냐’를 결정하는 측정을, 대상(예: 광자)이 이미 ’선택’을 완료했을 것이라 생각되는 시점보다 훨씬 나중에 수행해도, 그 결과가 마치 우리가 처음부터 그 설정을 한 것처럼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 기본 개념 (Fundamental Concepts)
휠러의 지연선택 (Wheeler’s Delayed Choice): 광자가 간섭계(예: 마하-젠더)에 이미 들어간 이후에, 우리가 간섭 무늬를 볼 것인지(파동 성질) 아니면 경로를 확인할 것인지(입자 성질)를 결정하는 실험입니다.
상세 설명: 갈림길에 선 여행자의 비유 ✈️
한 여행자(광자)가 공항(BS1)에서 출발해 두 항로(Path 1, Path 2) 중 하나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고 상상해 봅시다.
- 경로 측정 (입자): 우리가 도착 공항을 두 개(D1, D2)로 분리해두면, 여행자는 D1 아니면 D2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아, A 항로(Path 1)로 왔구나” 또는 “B 항로(Path 2)로 왔구나”를 100% 알 수 있습니다.
- 간섭 측정 (파동): 우리가 도착 직전, 두 항로를 하나의 ‘합류 터미널’(BS2)로 모이게 만들면, 두 경로에서 온 여행자는 서로 간섭합니다. 날씨(위상차)에 따라 모든 여행자가 D1으로만 가거나 D2로만 갈 수 있습니다 (간섭 무늬).
지연선택의 핵심: 이 ’합류 터미널(BS2)’을 설치할지 말지를, 여행자가 이미 비행 중일 때(BS1을 지난 후) 결정해도 결과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터미널을 설치하면(나중 선택) 간섭 무늬가, 제거하면(나중 선택) 경로 통계가 나옵니다. 이는 광자가 미리 “나는 입자야” 또는 “나는 파동이야”라고 정하지 않았음을 시사합니다.
양자 지우개 (Quantum Eraser): 입자의 경로를 알 수 있도록 ‘표식(marker)’을 붙여 간섭 무늬를 의도적으로 없앤 다음, 나중에 그 표식 정보를 ‘지우는’ 측정을 통해 간섭 무늬를 선택적으로 복원하는 기법입니다.
상세 설명: 이중 슬릿과 편광 안경 🕶️
- 간섭 소거: 이중 슬릿 실험에서, 슬릿 1에는 수직 편광판(\(|V\rangle\))을, 슬릿 2에는 수평 편광판(\(|H\rangle\))을 놓습니다. 이제 어떤 광자가 스크린에 도달했는지 편광만 봐도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 100% 알 수 있습니다(\(|V\rangle \perp |H\rangle\)). 이처럼 경로 정보(입자 성질)가 완벽해지면, 상보성 원리에 의해 간섭 무늬(파동 성질)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 정보 지우기: 스크린 앞에 45도 편광판(\(|D\rangle\))을 놓습니다. 이 편광판을 통과한 광자는 \(|V\rangle\)에서 왔든 \(|H\rangle\)에서 왔든 모두 45도 편광 상태가 됩니다. 즉, 원래의 경로 정보(\(|V\rangle\)인지 \(|H\rangle\)인지)가 지워졌습니다.
- 간섭 복원: 놀랍게도, 45도 편광판을 통과한 광자들만 모아서 보면, 이들의 스크린 상 분포는 다시 간섭 무늬를 보입니다! 45도 편광판을 통과하지 못한(135도 편광판을 통과한) 광자들은 또 다른 간섭 무늬(위상이 반대인)를 보입니다.
상보성과 정보 (Complementarity and Information): 간섭 무늬의 선명도(가시도, \(V\))와 우리가 경로를 얼마나 잘 구별할 수 있는지(구별도, \(D\)) 사이에는 \(V^2 + D^2 \le 1\) 이라는 상보적 관계가 성립합니다. 양자 지우개는 \(D=1, V=0\) 상태에서, ‘지우개’ 측정을 통해 \(D < 1\)인 부분집합을 골라내어 \(V > 0\)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2. 기호 및 핵심 관계식
간섭 진폭 (Interference Amplitude): 두 경로 \(\psi_1, \psi_2\)를 지나는 시스템의 진폭은 \(\mathcal{A} = \psi_1 + \psi_2\) 입니다. 검출 확률(강도)은 \(I \propto |\psi_1 + \psi_2|^2 = |\psi_1|^2 + |\psi_2|^2 + 2\text{Re}(\psi_1^* \psi_2)\) 입니다.
경로 표식 (Which-Path Marking): 경로 정보를 표식(marker) 상태 \(|m_p\rangle\)에 저장하면, 전체 상태는 얽힘 상태가 됩니다. \(|\Psi\rangle = \psi_1(x) |m_1\rangle + \psi_2(x) |m_2\rangle\) 이때 스크린 \(x\)에서 표식을 무시하고 검출할 확률(강도)은 \(I(x) \propto |\psi_1(x)|^2 + |\psi_2(x)|^2 + 2\text{Re}(\langle m_1|m_2\rangle \psi_1^*(x)\psi_2(x))\)
- \(\mu = \langle m_1|m_2\rangle\)는 표식 상태의 내적(overlap)입니다.
- 만약 표식이 완벽히 구별되면(\(|m_1\rangle \perp |m_2\rangle\)), \(\mu = 0\) 이 되어 간섭항(\(2\text{Re}(\dots)\))이 사라집니다.
양자 지우개 (Conditional Erasure): 표식 상태를 ‘지우개 기저’ \(|e\rangle\)로 측정(투영)할 때, \(x\)에서 발견될 조건부 확률은 다음과 같습니다. \(P(x | e) = |\langle x| \langle e | \Psi \rangle|^2 = |\psi_1(x)\langle e|m_1\rangle + \psi_2(x)\langle e|m_2\rangle|^2\)
- 만약 지우개 상태 \(|e\rangle\)가 \(\langle e|m_1\rangle = \langle e|m_2\rangle \neq 0\) 을 만족하도록(예: \(|e\rangle = \frac{1}{\sqrt{2}}(|m_1\rangle + |m_2\rangle)\)) 선택되면, 간섭항이 \(\psi_1^*\psi_2\) 형태로 완벽하게 복원됩니다.
인과성에 대한 오해 바로잡기 (No Retrocausality):
💡 나중의 선택이 과거를 바꾸는가? (아니다!)
지연선택이나 양자 지우개가 “미래의 측정이 과거의 사건(광자가 입자였는지 파동이었는지)을 바꾼다”고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 전체 통계는 불변: ’지우개’를 쓰든 안 쓰든, 스크린에 쌓인 전체 광자들의 분포는 항상 간섭 무늬가 없는 상태(경로 정보가 있는 상태)입니다.
- 조건부 선택: ‘지우개’ 측정은 이미 스크린에 도달한 광자들 중, 특정 조건(예: 45도 편광판 통과)을 만족하는 데이터만 골라내는(post-selection) 작업입니다.
즉, 나중의 선택은 과거의 물리적 실재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통계적 부분집합을 들여다볼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마치 암호문(전체 통계)을 받았는데, 나중에 받은 해독 키(지우개 측정)로 그 안의 숨겨진 메시지(간섭 무늬)를 읽어내는 것과 같습니다.
3. 손쉬운 예제 (Examples with Deeper Insight)
- 예제 A1: 마하-젠더 간섭계
- BS2 제거 (입자 경로): 첫 번째 빔 스플리터(BS1)를 지난 광자는 경로 1 또는 2를 확정적으로 따릅니다. 경로 1은 검출기 D1로, 경로 2는 검출기 D2로 갑니다. \(\Delta\phi\)를 바꿔도 D1, D2의 확률은 50:50으로 일정합니다. \(\to\) 경로 판정 (Which-Path).
- BS2 삽입 (파동 간섭): 두 번째 빔 스플리터(BS2)는 두 경로를 다시 결합시킵니다. 두 경로의 위상차 \(\Delta\phi\)에 따라 D1에서는 \(I \propto \cos^2(\Delta\phi/2)\) (보강/소멸 간섭), D2에서는 \(I \propto \sin^2(\Delta\phi/2)\)의 간섭 무늬가 나타납니다. \(\to\) 간섭 (Wave-like).
- 예제 A2: 이중 슬릿과 편광 표식
- 표식 (간섭 소거): 슬릿 1 \(\to |H\rangle\) 편광, 슬릿 2 \(\to |V\rangle\) 편광. \(\langle H|V\rangle = 0\) 이므로 간섭이 사라집니다. 스크린에는 두 개의 단일 슬릿 무늬가 겹쳐 보입니다.
- 지우개 (간섭 복원): 스크린 앞에서 45도(\(|D\rangle\)) 편광판으로 측정합니다.
- 조건부 확률 \(P(x|D) \propto |\psi_1(x)\langle D|H\rangle + \psi_2(x)\langle D|V\rangle|^2 = |\frac{1}{\sqrt{2}}\psi_1(x) + \frac{1}{\sqrt{2}}\psi_2(x)|^2\). \(\psi_1\)과 \(\psi_2\)의 간섭 무늬가 복원됩니다.
- 만약 135도(\(|A\rangle\)) 편광판으로 측정하면 \(P(x|A) \propto |\frac{1}{\sqrt{2}}\psi_1(x) - \frac{1}{\sqrt{2}}\psi_2(x)|^2\). 위상이 반대인 간섭 무늬가 복원됩니다.
- 예제 B1: 얽힘을 이용한 지연선택 양자 지우개
- 설정: 얽힌 광자 쌍(Signal, Idler)을 생성합니다.
- 신호(Signal): 이중 슬릿을 통과하여 스크린(D0)에 기록됩니다. (간섭 무늬 생성 시도)
- 표식(Idler): 신호 광자가 어느 슬릿을 지났는지에 따라 Idler 광자의 경로가 달라지도록(즉, Idler가 ’경로 정보’를 갖도록) 설정합니다.
- 지연선택: 신호 광자가 D0에 도달한 후에, 우리는 Idler 광자의 측정 방식을 결정합니다.
- 경로 읽기: Idler가 어느 경로로 왔는지 측정합니다 (D1 또는 D2).
- 경로 지우기: Idler의 두 경로를 빔 스플리터(BS)로 합친 후 측정합니다 (D3 또는 D4).
- 결과: D0에 기록된 전체 데이터는 간섭 무늬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데이터를 ‘Idler가 D3에서 검출됨’ 조건으로 골라내면 간섭 무늬가 나타나고, ‘Idler가 D1에서 검출됨’ 조건으로 골라내면 간섭 무늬가 없습니다.
4. 연습문제
- 가시도와 표식 내적: 두 경로(\(\psi_1, \psi_2\))가 표식 상태(\(|m_1\rangle, |m_2\rangle\))와 얽혀 있을 때, 스크린 \(x\)에서의 전체 강도 \(I(x)\)가 표식 내적 \(\mu = \langle m_1|m_2\rangle\)에 의해 \(I(x) \propto |\psi_1(x)|^2 + |\psi_2(x)|^2 + 2\text{Re}(\mu \psi_1^*(x)\psi_2(x))\) 꼴이 됨을 보이십시오. \(\mu=0\)일 때 간섭이 소거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 조건부 간섭 복원: 양자 지우개에서 표식 분석기 상태 \(|e\rangle\)로 조건화했을 때, 조건부 강도 \(I(x|e)\)에 간섭항이 복원되려면 \(\langle e|m_1\rangle\)과 \(\langle e|m_2\rangle\)가 어떤 조건을 만족해야 하는지 설명하십시오.
- 마하-젠더 전이 진폭: 50:50 빔 스플리터와 거울의 전이 행렬을 이용하여, 마지막 빔 스플리터(BS2)가 있을 때와 없을 때 각각 두 검출기에서 검출될 확률을 위상차 \(\Delta\phi\)의 함수로 계산하십시오.
- 지연선택과 인과성: “나중의 결정”이 과거를 바꾸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부 통계와 전체 결합 분포의 불변성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설명하십시오.
- 상보성 관계: 보어의 상보성 원리(측정 장치의 배치가 파동 또는 입자 현상 중 하나를 배타적으로 드러낸다)가 지연선택 및 양자 지우개 실험 결과와 어떻게 양립하는지 요약하여 서술하십시오.
5. 해설
- 전체 상태는 \(|\Psi\rangle = \psi_1(x)|m_1\rangle + \psi_2(x)|m_2\rangle\)입니다. 스크린 \(x\)에서의 확률 밀도는 표식 상태에 대해 부분 자취를 취한 밀도 행렬 \(\rho_S(x) = \text{Tr}_m(|\Psi\rangle\langle\Psi|)\)의 대각 성분입니다. \(\rho_S(x) = |\psi_1(x)|^2 |m_1\rangle\langle m_1| + |\psi_2(x)|^2 |m_2\rangle\langle m_2| + \psi_1(x)\psi_2^*(x) |m_1\rangle\langle m_2| + \dots\) \(I(x) = \langle x|\text{Tr}_m(\rho_S(x))|x\rangle\) … (이 유도는 복잡함). 더 쉬운 방법: \(I(x) = \text{Tr}(\hat{P}_x |\Psi\rangle\langle\Psi|) = \langle\Psi|\hat{P}_x|\Psi\rangle = ( \psi_1^*\langle m_1| + \psi_2^*\langle m_2| ) (\psi_1|m_1\rangle + \psi_2|m_2\rangle) = |\psi_1|^2\langle m_1|m_1\rangle + |\psi_2|^2\langle m_2|m_2\rangle + \psi_1^*\psi_2 \langle m_1|m_2\rangle + \psi_2^*\psi_1 \langle m_2|m_1\rangle\). \(|m_p\rangle\)가 정규화되었다고 가정하면(\(\langle m_p|m_p\rangle=1\)), \(I(x) \propto |\psi_1|^2 + |\psi_2|^2 + 2\text{Re}(\mu \psi_1^*\psi_2)\) 입니다. \(\mu=0\)이면(직교 표식), \(\psi_1^*\psi_2\) 항이 0이 되어 간섭이 사라집니다.
- \(I(x|e) \propto |\psi_1(x)\langle e|m_1\rangle + \psi_2(x)\langle e|m_2\rangle|^2\). 간섭항은 \(2\text{Re}(\psi_1^*\psi_2 \langle m_1|e\rangle \langle e|m_2\rangle)\)입니다. 이 항이 살아남으려면 \(\langle e|m_1\rangle\)과 \(\langle e|m_2\rangle\)가 둘 다 0이 아니어야 합니다. 최대 간섭을 위해서는 \(|\langle e|m_1\rangle| = |\langle e|m_2\rangle|\) 여야 합니다.
- BS 행렬 \(U_{BS} = \frac{1}{\sqrt{2}}\begin{pmatrix} 1 & i \\ i & 1 \end{pmatrix}\), 거울 \(U_M = \begin{pmatrix} 0 & 1 \\ 1 & 0 \end{pmatrix}\), 위상 \(U_\phi = \begin{pmatrix} e^{i\phi_1} & 0 \\ 0 & e^{i\phi_2} \end{pmatrix}\).
- BS2 제거: D1 확률은 경로 1만, D2 확률은 경로 2만. 각각 50% (위상차 무관).
- BS2 삽입: \(U_{BS} U_\phi U_{BS} |0\rangle\)을 계산하면, D1 확률은 \(\cos^2(\Delta\phi/2)\), D2 확률은 \(\sin^2(\Delta\phi/2)\) (\(\Delta\phi = \phi_2-\phi_1+\pi/2\) 등)로 간섭이 나타납니다.
- 지연선택에서 ‘BS2 삽입’과 ’BS2 제거’는 서로 다른 실험 설정을 의미합니다. 각 설정에서 얻은 전체 데이터 분포는 다릅니다. 양자 지우개에서는 전체 데이터(모든 Idler 측정 결과 포함)는 ’지우개’ 설정과 무관하게 항상 동일한 (간섭 없는) 분포를 보입니다. ‘지우개’ 측정은 이 전체 데이터 중 특정 부분집합을 분류하는 기준을 나중에 제공할 뿐이며, 이미 기록된 개별 광자 데이터를 바꾸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과 역행은 없습니다.
- 보어의 상보성은 ’파동’과 ’입자’라는 고전적 그림에 집착할 때 모순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지연선택/지우개 실험은 “측정 장치의 전체 설정(Context)”이 우리가 최종적으로 얻는 “통계적 현상”을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BS2를 삽입하는 설정은 ’간섭 통계’를, BS2를 제거하는 설정은 ’경로 통계’를 산출하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광자가 BS1을 지날 때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으며, 전체 실험 장치(광원, BS1, 경로, BS2/지우개, 검출기)가 하나의 통합된 시스템으로서 최종 통계를 결정한다는 점에서 상보성과 완벽하게 양립합니다.